한겨레 칼럼 가서 읽기

이병곤 | 전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내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물건이 좋다. 길 잘 든 혁대, 귀퉁이 닳은 수첩, 내 어깨에 착 달라붙는 배낭 따위가 그렇다. 혁대, 수첩, 배낭은 오랫동안 내 소유였으며, 나의 ‘깊은 애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종의 ‘혼’이 묻어 있다고 바라보지는 않는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물건을 가리켜 ‘타옹가’(taonga)라 부른다. 모든 타옹가에는 그것을 산출한 숲, 산지, 토지가 부여한 영(靈), 다른 말로 ‘하우’(hau)가 깃들어 있다. 아는 사람이 동물 뼈로 만든 빗을 주었다 치자. 빗을 받은 이는 그것을 일정 기간만 소유하다가 다른 이에게 건네준다. 빗에 담긴 ‘하우’의 힘이 작용해 그것을 받은 이가 병에 걸리거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신념 때문이다. 사물에 각인된 주술, 종교, 영적인 힘으로 인해 물건들은 마오리 부족 안에서 계속 순환한다.
북서부 아메리카 해안 지대에 거주했던 콰키우틀족에겐 ‘포틀래치’(potlatch) 전통이 내려온다.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 용어는 현대 한국 젊은이들이 속어로 사용하는 ‘탕진잼’ 비슷한 느낌을 전해준다.
다만 포틀래치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특정한 의식을 치르면서 실행된다. 생선기름이나 고래기름 통을 깡그리 태워버리거나 집을 비롯해 수천장의 담요를 태우기도 했다. 상대방을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거나, 조각내어 부족민들에게 나눠 주거나, 물속에 던져버릴 때도 있었다. 마치 ‘부의 투쟁’ 같은 행태가 이뤄지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가족, 또는 추장이나 부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 이런 의식을 통해 콰키우틀족의 법과 경제 체계에서는 막대한 부가 끝없이 소비되거나 이전된다.
마오리족과 콰키우틀족 사례는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1872~1950)의 저서 ‘증여론’(1925)에서 가져왔다. 모스는 외친다. 기업처럼 경제적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되기 이전의 우리 인류를 상상해보자고.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모스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만으로 이뤄지는 대신 주고-받고-답례하는 인간적 교류와 결속에 뿌리 둘 수는 없는가 반문한다.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 미수에 그쳤으나 열흘 가까이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3일 밤 ‘최강 야구’를 보느라 때마침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나는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내 생애 세번째 계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보았다. 순식간에 의사당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움직임을. 군용 차량 앞을 몸으로 막아서는 사람들을. 무장한 최정예 병력 앞에 맨가슴으로 스크럼 짜고 맞서는 용기를.
나의 생체 세포와 뇌 신경망에는 자동으로 1980년 ‘5월 광주’의 이미지가 현재 상황과 겹쳐서 떠올랐다. 당시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의 ‘하우’가 역사의 물줄기라는 ‘타옹가’를 타고 우리에게 전류처럼 흐르는 듯했다. 눈물이 솟았다. 그분들이 피로 아로새겨 물려준 민주주의 덕분에 후세대가 겁먹지 않고, 오도된 국가 폭력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젊은 세대가 응원봉을 흔들며 부르는 ‘아파트’와 ‘다시 만난 세계’가 내 고막을 지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번역되어 들린다. 마르셀 모스가 동의할지는 모르나 ‘증여’와 ‘되갚기’ 행위는 세대 간에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
오는 12월31일에 제천간디학교 교장으로서 임기를 마친다. 꼬박 8년을 학생, 교사, 학부모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이 산골로 이끌었을까? 대안학교 출현 첫 단계를 이끈 1세대 교육실천가들의 삶이었다. 훌륭한 교육 현장의 명맥을 잇고 싶었다. 무엇이든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내가 알량하게 내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깨달음과 확신, 실천적 지혜를 얻었다.
인류의 조상들이 가졌던 ‘투쟁적인 환대’와 ‘광기 어린 소비’가 모든 부족민들에게 열렬하게 환영받던 시대를 상상해보라.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서 가장 덜 자본주의적인 연대와 사랑의 정신을 모닥불 쬐듯 잠시라도 오롯하게 느껴볼 공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가난했던 원주민들이 실천했던 ‘고귀한 지출’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보고 싶다. 그런 공동체 한가운데서의 삶 자체가 참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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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곤 | 전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내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물건이 좋다. 길 잘 든 혁대, 귀퉁이 닳은 수첩, 내 어깨에 착 달라붙는 배낭 따위가 그렇다. 혁대, 수첩, 배낭은 오랫동안 내 소유였으며, 나의 ‘깊은 애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종의 ‘혼’이 묻어 있다고 바라보지는 않는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물건을 가리켜 ‘타옹가’(taonga)라 부른다. 모든 타옹가에는 그것을 산출한 숲, 산지, 토지가 부여한 영(靈), 다른 말로 ‘하우’(hau)가 깃들어 있다. 아는 사람이 동물 뼈로 만든 빗을 주었다 치자. 빗을 받은 이는 그것을 일정 기간만 소유하다가 다른 이에게 건네준다. 빗에 담긴 ‘하우’의 힘이 작용해 그것을 받은 이가 병에 걸리거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신념 때문이다. 사물에 각인된 주술, 종교, 영적인 힘으로 인해 물건들은 마오리 부족 안에서 계속 순환한다.
북서부 아메리카 해안 지대에 거주했던 콰키우틀족에겐 ‘포틀래치’(potlatch) 전통이 내려온다.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 용어는 현대 한국 젊은이들이 속어로 사용하는 ‘탕진잼’ 비슷한 느낌을 전해준다.
다만 포틀래치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특정한 의식을 치르면서 실행된다. 생선기름이나 고래기름 통을 깡그리 태워버리거나 집을 비롯해 수천장의 담요를 태우기도 했다. 상대방을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거나, 조각내어 부족민들에게 나눠 주거나, 물속에 던져버릴 때도 있었다. 마치 ‘부의 투쟁’ 같은 행태가 이뤄지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가족, 또는 추장이나 부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 이런 의식을 통해 콰키우틀족의 법과 경제 체계에서는 막대한 부가 끝없이 소비되거나 이전된다.
마오리족과 콰키우틀족 사례는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1872~1950)의 저서 ‘증여론’(1925)에서 가져왔다. 모스는 외친다. 기업처럼 경제적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되기 이전의 우리 인류를 상상해보자고.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모스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만으로 이뤄지는 대신 주고-받고-답례하는 인간적 교류와 결속에 뿌리 둘 수는 없는가 반문한다.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 미수에 그쳤으나 열흘 가까이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3일 밤 ‘최강 야구’를 보느라 때마침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나는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내 생애 세번째 계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보았다. 순식간에 의사당 앞에 모여든 시민들의 움직임을. 군용 차량 앞을 몸으로 막아서는 사람들을. 무장한 최정예 병력 앞에 맨가슴으로 스크럼 짜고 맞서는 용기를.
나의 생체 세포와 뇌 신경망에는 자동으로 1980년 ‘5월 광주’의 이미지가 현재 상황과 겹쳐서 떠올랐다. 당시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의 ‘하우’가 역사의 물줄기라는 ‘타옹가’를 타고 우리에게 전류처럼 흐르는 듯했다. 눈물이 솟았다. 그분들이 피로 아로새겨 물려준 민주주의 덕분에 후세대가 겁먹지 않고, 오도된 국가 폭력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젊은 세대가 응원봉을 흔들며 부르는 ‘아파트’와 ‘다시 만난 세계’가 내 고막을 지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번역되어 들린다. 마르셀 모스가 동의할지는 모르나 ‘증여’와 ‘되갚기’ 행위는 세대 간에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
오는 12월31일에 제천간디학교 교장으로서 임기를 마친다. 꼬박 8년을 학생, 교사, 학부모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이 산골로 이끌었을까? 대안학교 출현 첫 단계를 이끈 1세대 교육실천가들의 삶이었다. 훌륭한 교육 현장의 명맥을 잇고 싶었다. 무엇이든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내가 알량하게 내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깨달음과 확신, 실천적 지혜를 얻었다.
인류의 조상들이 가졌던 ‘투쟁적인 환대’와 ‘광기 어린 소비’가 모든 부족민들에게 열렬하게 환영받던 시대를 상상해보라.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서 가장 덜 자본주의적인 연대와 사랑의 정신을 모닥불 쬐듯 잠시라도 오롯하게 느껴볼 공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가난했던 원주민들이 실천했던 ‘고귀한 지출’을 현대적으로 되살려보고 싶다. 그런 공동체 한가운데서의 삶 자체가 참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