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칼럼


[곤샘 칼럼] 마음은 민주주의의 집이다

한겨레 칼럼


"마음은 민주주의의 집이다"

이병곤 전 교장선생님


감정은 추상적이다. 흰 종이 위에 ‘분노’라고 적어보자. 단어 하나에 그칠 뿐이다. 그 앞에 ‘일제의 폭압적 수탈에 대한’ 또는 ‘해병대 사병의 억울한 순직에 대한’이라고 적는다면? 분노라는 감정에 맥락과 구체성이 부여된다.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폭발력 강한 흡착력, 이것이 감정의 본질이다. 핵심은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도의 추상성을 지닌 감정에 구체성이라는 성냥불을 효과적으로 긋느냐 하는 점이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그리고 대안교육 관련 단체들에 소속하면서 숱한 회의에 참여해봤다. 짐작하겠지만 이들 학교나 단체는 우리 사회 일반보다 조직 민주화 수준이 상당히 높다. 그럼에도 회의 과정이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다.


예컨대 학교의 중요한 축제 행사를 이끌어가야 하는 학생 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공교롭게 그날 학교 외부에서 열리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와 겹쳤다. ㄱ은 “그 콘서트에 반드시 가야 한다”며 학교 쪽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냈다. 교사회는 토론을 시작한다. 이내 혼란에 빠진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자. 우리 대안학교 맞냐. 보내주자. 주말 아이돌 그룹 공연이 한두개냐. 한번 예외를 만들면 앞으로 주말 학교 행사는 아예 문 닫아야 할 거다. ㄱ은 선배로서 책임을 더 의식해야 할 고학년인데 학생 자치에 대한 배려심 부족이 아쉽다.’


논쟁의 겉면만 보면 논리와 논리가 부딪친 토론 같다. 속 깊은 층위가 하나 더 있다. 오랜 세월 ㄱ과 함께 학교생활을 해온 교사들은 그 아이에 대해 호오의 감정을 저마다 달리 가진다. 교사회 내부에 자유주의 기질을 가진 분파와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분파가 나뉠 수도 있다. 여기에 세대와 성별 차이에 따른 변수가 사안마다 더 얹혀간다. 그리되면 쟁점 사안은 그 주제가 다를지라도 회의 때마다 부딪히는 지점이나 갈등을 드러내는 인물군은 비슷하다. 기질이나 감정이 개입될 경우 이성과 논리의 영역은 축소된다. 민주주의는 이성적 논리가 부딪히기에 불안정한 체제라기보다 마음의 덫에 걸려 엎어지기 더 쉬운 감정 취약지대다.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헤매다가 최근 이 문장과 마주쳤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견보다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미국의 야생 지역 보존주의자이자 여성주의 작가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언명이다. 최태현 교수의 책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읽다 발견했다. 40년 전쯤 진보운동 세력이 한국 사회의 정치 의제를 설정할 만큼 힘을 가졌을 당시 ‘품성론’이 반짝 등장한 때가 있었다. 진보운동이 대중적 정당성과 확산을 꾀하려면 조직활동가들이 솔직함, 소박함, 겸손함, 성실성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숱한 정파 가운데 어느 한쪽의 제안이었고, 운동의 ‘몰지성화’를 촉발한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한동안 울림이 컸던 말로 기억한다. 


최근 들어 자주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민주주의자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나는 민주주의자인가?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해 어떤 공부와 훈련을 거쳤던가? 스스로 확신이 없으면서 왜 나는, 또는 내가 속한 조직은 ‘그나마’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논리적으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다수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만한 그런 결정을 민주적으로 해왔노라 의식한 적이 많았다. 정말 그랬을까? 윌리엄스 작가가 던진 첫마디에 명치 끝이 아렸다. 민주주의의 첫번째 집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만 번지르르했지, 누군가의 발언을 ‘전 존재로 경청해본’ 적도 없을 만큼 나는 오만했다. 


사람의 생각을 교환하고, 그것을 통해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공론장에는 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뤄야 한다. 좋은 판단과 결정은 거기에서 나온다. 나는 교육의 마당에서 시민적 덕성과 마음의 정치학을 더 긴밀히 탐구해야 한다고 본다. 마음을 정치적으로 내버려두면 그 빈자리를 혐오와 독재가 날름 차지한다. 미국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왜 ‘정의를 위해 사랑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는지 그 이유를 깊이 사유해봐야겠다.